경상 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안동의 땅, 등허리가 유연한 강이 휘돌아 흐른다. 그래서 하회河回라 불려왔다. 그 안쪽에 자리 잡은 마을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옛적 양반가와 농촌마을의 고즈넉함과 정겨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 옛 향기 어리움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 안동 하회마을, 산책로
안동 하회마을의 매표소. 오전 9시에 문을 연다. 일찌감치 찾아 표를 끊었다. 입장권 판매소에서 마을까지는 버스로 2-3분 거리, 무료 셔틀까지 있다고. 찾기 좋게 관리 잘 되고 있는 점, 좋다. 버스가 편하지만, 갈림길에서 망설이는 지인의 느려지는 발걸음을 재촉해 부러 산책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의 길과 나란한 산책로. 걸어야 걸음의 리듬에 맞춰 숨 쉬고 느낄 수 있다. 금세 짙어지는 숲의 숨. 20여 분 남짓, 입구부터 천천히 걸어들어가보면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와 닿는다. 공기는 젖어있다. 부엽토 삭는 내음이 섞였다.
가는 길은 솔숲이다. 노송림의 푸른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숲을 지나면 트인 곳이 나온다. 따뜻한 커피 한잔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 이른 시간, 새벽이슬에 젖은 민들레 홀씨들이 이제 막 물기운을 떨어내고 있다. 이 언덕배기, 정경이 곱다. 언덕 너머로 마을의 얼굴이 살짝 비친다. 버스로 휙 지났다면 몰랐을 풍경이다. 강 흐름 느려지는 곳에 세월에 누적되어 있다. 활엽수와 침엽수가 눈을 아름아름 가린다. 그 사이로 보이는 마을은 이른 아침 깨지 않은 듯 인적이 드물다.
* 안동 하회마을, 박제된 마을 安東 河回
매표소를 지나 안동 하회마을의 진짜 입구. 둥그레 한 돌에 마을 이름이 적혔다. 입구에도 관리소가 있다. 객이 찾기 좋게 잘 운영하고 있다. 흐린 날씨에 고개를 갸웃하며 하늘을 바라보니 우산을 무료로 빌려 준단다. 무료 라커도 있으니 짐도 두고 갈 수 있단다. 친절한 응대가 고마웠다. 조금은 와글한 입구의 상점과 음식점을 지났다. 이제 정말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을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발길 좌우로 일렁이는 노오란 색은 풍요롭게 대지를 물들이고 있다. 초록에서 황금빛으로 물드는 벌판은 보는 이로 하여금 푸근하게 한다. 우쭐우쭐 바람결에 옷자락을 펄럭이는 허수아비들. 팔 벌린 허수아비들이 반겨주는가, 나도 모르게 손짓하게 된다. 처마의 선이 날렵한 집들이 벌판의 주인임을 말해주듯 당당하게 서있다. 저 기와를 시작으로 과거를 박제한 유 씨 마을, 하회마을이다.
* 안동 하회마을, 가옥들
마을 입구의 지도를 따라 유서 깊은 집들을 찾아간다. 벌컥 문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 지금도 여전하게 사람들이 살고 있다. 조용하게 지난다. 닫힌 문을 굳이 열지는 않는다. 골목 사이 담 너머 가지를 내민 감나무나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을 길은 남북으로 이어지며 곁길들이 있다. 길은 집으로 이어진다. 하나하나 예스럽다. 풍산 유 씨(豐山柳氏) 동족마을로 일가의 터전이 여기다. 유 씨 이전에는 허 씨(許氏)·안 씨(安氏) 등이 살았다.
수백 년 장구한 마을의 역사를 빠르게 읽는다. 아무래도 익숙한 이름은 유성룡. 청빈하고 학식 높던 유성룡 시절 즈음하여 이곳은 지금처럼 유 씨의 거대한 마을을 이루었다. 지금 보는 주요한 집들, 모두 유 씨 집안 가옥이란다.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마을이 자리잡은 건 조선시대란다. 조선시대부터 꾸려진 마을이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 민속문화재로 하회북촌댁, 하회원지정사, 하회풍산류씨작천댁 등이 있다.
골목 따라 번듯한 각 집들에 가까이 가면 설명판이 있다. 누구네가 살았고 이 집들은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는지 찬찬히 살피면 정말 조선시대 한가운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구나 싶다. 어느 문이 삐걱 열리면 도포 자락을 날리며 걷는 선비나 종종대는 아낙네를 만날 것 같다. 양진당, 충효당, 북촌댁, 남촌댁 등이 주요한 가옥이다. 이중 양진당은 문중 모임을 하는 곳이라고. 마룻장이며 대들보 하나하나 시간에 짙어진 나무색이며 반질대는 모서리 등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소가 여물 먹었을 외양간이며 불을 땠을 아궁이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우툴두툴한 돌담이며 돌계단도 고스란하다. 골목골목 많은 집들이 과거를 판다. 관광객을 상대로 민박을 하고 식음료를 파는 곳도 꽤 된다. 겉모습은 한옥이지만 한지 바른 창엔 유리가 끼워져 있고 방 내부에는 에어컨이며 덧문 설비가 다 되어 있다. 과거를 박제하는-유지 보수의 애씀이 상당하다. 토담으로 안팎을 나눈 집들. 목조 가옥과 부드럽게 어우러진 풍경을 만들기 위해 공사 중인 곳도 꽤 된다. 수리한다 해도 세월 스며든 문이며 창틀 그대로 두기에 살기엔 불편한 면도 있겠지만 스쳐 지나가는 눈에는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한 마을, 이색적이다. 불현듯 번듯한 기와집의 문턱에 서니 드니 초가가 내려다 보인다. 세도가의 기와 대신 들판의 벼가 여기 지붕으로, 담으로 녹아들어있다. 불과 한걸음 더 높이 있는 듯싶은데 아래로 내려다보게 된다. 지체 높은 양반 권세가는 이렇게 소작인들의 집을 아래로 보았을까- 반상의 경계 너머 시선을 멀리 보낸다.
하회마을 더 깊숙한 곳을 향하면 최근에 지은 건물이 새초롬하게 앉아 있다. 이 마을의 역사를 보여주는 작은 박물관이다. 유성룡에 대한 기록들, 이런저런 생활 소품들을 보여 준다. 박물관의 내부보다 난간에서 보이는 마을의 단면이 더 마음에 깊이 스민다.
* 안동 하회마을, 삼신당
좁다란 골목길이 나온다.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이 담을 경계로 슬몃 보인다. 토담을 따라 지분지분 발걸음을 이어간다. 저 끝에 마을의 중심이 있다. 둥그런 하회 마을의 축과 같은 곳이 골목 끝에 있다. 바로 축은 나무다. 신이 머무는 삼신당이다. 마을 중앙에 마을을 지키는 신처럼 자리한다. 수령이 600여 년이 넘은 나무로, 나무 허리 굵기가 놀랍다. 당연히도 마을 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여긴다. 이곳의 신에게 정월 대보름 다음날 아침,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올린단다.
이 나무가 있는 삼신당은 특별한 곳이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낼 때 신내림을 받은 각시에 이어 신을 흥겹게 해 주는 놀이, 탈놀이를 한다. 하회탈의 웃음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여기가 그 유명한 탈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시작되는 곳이다. 나무며 탈의 머리며 흰 종이가 끝없이 매어 달렸다.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어디든 세월을 오래 견딘 자연물 앞에는 인간의 바람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인간의 생을 넘어서는 시간을 살아온 자연물은 신의 힘이 깃든, 경이와 경외의 존재로 여겨진다. 타지 객의 소원도 들어주는가, 바람이 많이 달렸다. 삼신당까지 마을 곳곳을 소근소근한 목소리와 나긋나긋한 발걸음으로 둘러보았다. 1시간 반 남짓. 둥그렇게 마을 길을 따라 돌아 원점으로 왔다. 가을 빛이 짙어지고 있었다.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있지만 이내 노란색과 갈색, 붉은빛으로 한순간에 타올랐다가 사그라지겠지.
* 안동 하회마을 풍경의 절정, 부용대
아직 하회마을을 덜 보았다. 부용대芙蓉臺를 보러 길을 이었다. 마을을 감싸며 흐르는 화천 花川 주변으로는, 모래밭이 있다. 모래밭 강 건너는 가파른 절벽, 부용대다. 여행이란, '보기 위해' 떠나는 이유가 크다. 그렇다면 부용대는 하회마을을 '보는' 정점이다. 놓치기 아깝다. 게다가 인근에는 옥연정과 화천 서당도 있어 함께 들르기 좋다. 마을에서는 모래밭에서 절벽으로 왕복하는 쪽배를 타고 부용대로 갈 수 있다. 승용차로 마을 밖으로 달려가면, 완만한 산길을 걸어 오를 수도 있다. 마을에서 차로 10여 분 달리면 부용대의 절벽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20여 분 정도 걸으면 금세 하회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절벽, 정점에 설 수 있다.
마을에서 부용대를 바라다보노라면 강도 모래밭도 규모가 참 크다 싶다. 강의 최대폭은 300m 가량, 수심은 5m 내외다. 과거 음력 7월 보름에 시회와 줄불놀이를 했다고. 삶의 즐김이 펼쳐졌을 당시를 상상한다. 징 소리, 북소리가 푸른 강물 위로 금빛 모래 사이에 함께 출렁였을 것이다. 고개를 휘 돌린다. 하회다.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터란다. 낙동강이 유장하게 마을을 둘러 흐르며 하회라는 이름을 증명한다. 오종종 모인 우아한 고택들, 수더분한 초가와 그 뒤로 풍요롭게 펼쳐지는 논밭, 이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산과 강. 강에 뜬 연꽃 같은 마을, 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 지형이라 한다. 가을빛으로 젖어들고 있는, 정말 꽃같은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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