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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정취 가득한 천년의 고도, 경주

맛.여행

by 태양광모듈.인버터 2017. 3. 18.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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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애틋하다. 곧 사라질 모든 것들이 어찌 이리 색색으로 고울까. 가을의 처연함이 곱게 스며있는 천년의 고도, 경주로 향했다. 지진으로 인한 놀람으로 가을이 조금 더 쓸쓸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도착해보니 경주에는 가을이 먼저 도착해 머물고 있었다.

 

 

* 가을, 경주 보문호수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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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와본 경주인지라 그저 찬연한 계절의 모습을 오롯하게 볼 수 있는 곳을 골랐다. 머물고 산책하고, 그렇게 보내기로 하고. 이른 아침 도착한 경주의 보문호수. 경주에서도 봄의 벚꽃으로, 가을의 단풍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호수는 잔뜩 찌푸린 채였다. 아침이 되어 가로등 불빛은 꺼졌는데, 온기 어린 햇살은 없어 그저 스산하게 느껴지는 가을의 옷자락. 거대한 호수는 회색으로 그득했다. 손 대기에는 너무 창백한 수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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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날이라도 그만의 색이 있다.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며 호숫가를 길게 걸었다. 이른 아침 인적 드문 길. 고요는 우묵 질의 평온한 표정을 짓고는 산책을 따라왔다. 호숫가를 지나 가로수길. 발걸음 소리에 사그락 부서지는 낙엽. 붉게 노랗게 물든 잎들이 속절없이 바닥으로 낙하하고는 모두들 갈빛으로 굳어지다가 바람에 쓸려, 부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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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밀려난 잎들은 방금 나무와 작별한 잎부터 애진작에 떨구어져 헤어진 나뭇잎까지 한데 뒤엉켜 있다. 이별도 갓 한 이별이 신선하듯, 갓 떨어진 단풍은 그래도 곱다. 고와서 처연하다. 오래된 이별은 남루하게 말라가다가 바스러지고 있다. 길을 걷는 내내 우아한 관현악곡이 들렸다. 곡을 따라 호수를 걷다보니 이내 서늘함에 코끝이 발갛게 물들고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현대호텔 경주로 들어갔다. 바로 보문호수 산책로와 이어져 있다. 호텔은 가만히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가을빛이 지상에, 수면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 현대호텔 경주, 호텔 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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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하고 반짝이는 얼굴을 태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텔 로비. 창밖에 가을이 부드럽게 농익어간다. 계절이 망설이지도 두리번대지도 않고 순번대로 왔다가 어김없이 가는 모습이 보인다. 유리창 안에서도 밖의 계절감은 참으로 짙게 드러나는구나 했다. 집에서, 회사 사무실만 벗어나도 자연이 이렇게 나날이 바뀌고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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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현실의 옹졸함과 구차함을 말끔히 도려낸 장소다. 호텔은 재활용품이 요일을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있지도, 주말에 몰아서 세탁하려고 쌓아놓은 빨랫감도 보이지 않는다. 소소하게 이어지는 일상이 다행스럽고 고맙지만 때로는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상이 소거된 장소에 머물고 싶다. 가끔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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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게 도식화된 공간으로 들어간다. 누군가 누웠어도 아무도 누웠던 적 없는, 우리는 함께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초면이라고 말하는 호텔 룸. 친구들과 조용하고 다정한 시간을 함께 보내기 좋은 호텔룸, 침대 세 개의 방도 있어 좋았다. 깔끔하다. 흰 커튼 사이로 보드레한 빛이 순하게 내려앉고, 내키면 진중한 베이지색 암막 커튼을 당겨 포근한 어둠을 부를 수 있다. 단아한 노란 불빛이 빳빳한 흰 베갯잇 위로 흘러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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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짐을 내려놓고 아이보리색 갓을 씌운 등을 켠다. 머플러를 풀고 침대 모서리에 앉아 화장대에 비친 익숙한 얼굴을 바라본다. 가을의 찬기운이 몸에 퍼져, 조금은 싸늘하다. 찬 바람에 식은 뺨을 두어 번 어루만지고는- 차가운 계절이란 곧, 서로 더 가까이 따뜻하게 마주하고 싶은 계절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방 안에서 잠시 차 한잔을 마시니 정말이지 손 안의 따스함이 각별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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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넉넉한 욕실,욕조와 샤워부스가 따로 있는 화장실. 세면대에는 어메니티가 놓여 있다. 칫솔 치약은 없다. 곱게 늙은 오래된 호텔, 온수와 냉수 손잡이가 분리되어 있기에 제각각 돌려 물 온도를 맞추었다. 낯선 오래됨이다. 욕조가 있어 물을 받아 반신욕을 하기도 좋다. 씻고 나서 밖으로 멀리 가지 않고 호텔 내에서 식사를 했다. 한 그릇 정갈한 식사, 충분히 좋았다.

 

 

 

* 경주, 보문 호반길의 가을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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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게 책을 읽고 식사를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이내 밤이 되었다. 호텔 밤, 경주 밤공기는 촉촉했고 낙엽 냄새가 섞여 있었다. 책 몇 장을 넘기다가 이내 잠들었고 아침이 되었다. 보문호수의 가을빛을 만나기 위해 온 만큼, 아침 낯을 씻고는 바로 보문호수의 산책로로 걸어들어갔다. 호수둘레에 조성된 8㎞ 보문 호반길은 가을정취가 가득이다. 성실하게 떠오르는 햇살은 붉은 잎새 사이를 지나 호수 위에 떨구어졌다. 멀리 아침 안개가 스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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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반 시간 정도 조금은 힘겹게 떠올랐다.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 얼굴을 따갑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따뜻하게는 못하는 가을의 해. 불그레한 장파장이 새벽이슬을 공기 중으로 띄워내고 있다. 새벽이 증발하고 아침이 점점 더 또렷해진다. 빛이 점점 단단해진다. 손으로 그늘 만들어 해를 비켜 보아야 할 때쯤 걷기 시작했다. 순광으로 단풍은 제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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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 찬란한 누군가가 있다. 아침 햇살의 간지러운 손길에 저도 모르게 생기 어린 빛깔로 웃는 잎들. 이 잎새들이 내쉬는 풀 내음 나무 내음에 사람들은 길을 걷는다. 밝은 아우라,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 반짝반짝 챙그랑거리며 퍼진다. 처연하고 애틋하게 여기어지던 가을이 눈부신 경쾌로 바뀐다. 그래도 찬란한 한때를 가졌으니까- 아쉽다 해도 돌이킬 수 없으니 크게 안타까울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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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터져 나오는 꽃잎들의 색은 소란하지만 가을에 흘러내리는 잎들의 색은 어딘지 모르게 과묵하다. 시작의 색과 마지막의 색은 체온이 다르다. 햇살로 반들반들 닦인 호수 위에 노랑과 빨강. 호수 면이 색동으로 매끌거리며 찰랑인다. 점점 더 빛으로 차오르는 보문호수길. 비발디의 가을도 예정된 기승전결의 흐름으로 길을 따라 흐른다.

 

 

 

3

시간을 가끔은 이렇게 보내도 괜찮다 싶다. 가만히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걷는 속도와 생각의 속도를 맞추며 조용하게 변하는 세상을 바라본다. 노랑과 초록과 빨강이 바람결에 일어섰다가 누웠다가 날렸다가 흩어지고는 새로 떨구어지기를 반복한다. 있었던 일들이 분명한데 하나도 없었던 일처럼 낙엽들은 희미하게 스쳐, 아무렇지 않게 날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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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로 느리게 흐르는 점심 나절을 보냈다. 이어 오후다. 만추의 오후, 금빛이었다. 여행은 흐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 낯선 곳에 멈추어 있는 것도 멋진 여행이다. 빛이 사선으로 길게 뻗는 걸 보고 다시 호텔 밖으로 나와 산책로에 섰다. 신선했던 아침에 이어 우아한 저녁을 맞이한다. 호수 살결에 금빛이 화려하게 섞여든다. 메타세쿼이아의 잎새가 햇살을 빗질하고, 빗질된 햇살은 잔선이 길게 그어진 채로 길에 내리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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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생기도 오후의 열의도 저녁에 접어들면 결국 사그러든다. 봄의 설렘도 여름의 열정도 가을에는 결국 서늘해진다. 서늘함은 서글픔으로 물든다. 이미 사라져버린 생기와 설렘, 열의와 열정에 대한 애도처럼. 애잔함 스민다. 새가 금빛에 내려앉는다. 곧 날아갈 것이다. 있었던 일들이 분명한데 하나도 없었던 일처럼 그 자리에는 새의 크기만큼의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다. 그 어떤 황금빛으로 찬란했던 때도 어김없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변할 것이다.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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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 호반길에서의 짧은 머무름. 가을은 한껏 깊게 무르익고 있었다. 아름답다는 것들은 안타까운 것들이기도 하다. 계절이 온다는 것과 간다는 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걷지만 걸음 하나하나가 쉽지가 앉다. 이렇게 반짝이는 계절 하나가 곧 사라지려 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올해의 가을이 곧 떠난다. 가을 깊어지는 이 때, 가을 속으로 하루쯤 깊숙하게 들어가 가을을 걷고 가을을 찍으며 붉고 노랗게 감성을 물들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경주 보문호수, 현대호텔 경주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로 338 (신평동)
- 전화 : 54-748-2233
- http://www.hyundaihot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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