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모래내 대장간 주인 김예섭 씨
쇠와 함께 평생을 담금질한 영원한 대장장이
땡 땡 때엥 땡~. 서울 한복판에서 웬 쇠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보면 이내 눈을 의심하게 된다. 모래내 대장간. 요즘 간판에 ‘대장간’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신기하거니와 그 안에서는 정말 대장간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지라 더욱 신기하다. 46년 동안 쇠를 만지며 살아온 김예섭 사장의 외길 인생을 들어보자.
모래내 대장간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방향 감각이 뛰어나다면 쇠를 두드리는 소리를 따라가며 대장간을 찾을 수 있다. 대장간 앞에는 여느 철물점처럼 호미며 낫, 칼 등이 판매대에 가지런히 놓인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요즘 서울에서 저런 것들을 누가 사갈까 싶은데, 뜻밖에 물건을 고르고 가격을 물어보는 손님들이 자주 들락날락거린다.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자 김예섭 사장이 화덕 속을 열심히 풀무질하고 있다. 뻘건 불꽃이 이글거리며 올라온다. 불과 2~3m 떨어진 바깥 기온과는 상관없이 대장간 안은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화덕에서 꺼낸 시뻘건 쇳덩이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큰 망치로 힘차게 내려치는 ‘함마질(해머질)’을 계속 할수록 단단한 쇳덩이에서는 불꽃이 튀긴다. 어느 정도 내려친 쇳덩이는 찬물이 가득 담긴 물통으로 옮겨 담금질을 한다. 물을 만난 쇳덩이는 허연 연기를 씩씩대며 내뿜고는 잔뜩 달아오른 몸뚱이를 식힌다.
김예섭 사장은 잠시 짬을 낼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말도 못 붙이고 10여 분을 대장간 불청객으로 서 있다. 대장간 안을 카메라에 담으면서도 성가시다는 듯 움직이는 김 사장의 길을 막지 않으려 애쓴다. 드디어 쇳덩어리 하나를 두드리다가 찬 물통에 넣어 담금질을 끝낸 김 사장은 이내 장갑을 벗고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연다.
“장인을 찾아서? 난 장인이 아닌데? 누가 나 같은 대장장이를 장인으로 봐준다고….”
뜬금없이 쓴소리를 뱉어내는 김예섭 사장. 담금질을 끝낸 쇳덩이처럼 차가운 말투다. 물 한 잔을 들이켠 김 사장은 “그래도 들어볼 것이 있으면 들어보라”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남 광양에서 태어난 김예섭 사장은 18살 어린 시절부터 대장간 일을 시작했다.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 누구나 학교에 가는 것보다는 기술을 익혀 어디든 취직하던 때였거니와 달궈진 쇠로 낫이며 호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마냥 신기해 보여 스스로 대장장이의 길을 택했다. 밤낮없이 일을 배우던 김 사장은 3년 동안 풀무질만 하다 비로소 망치를 잡을 수 있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대장장이 일을 했건만 제대 후에는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평소 몸이 약하던 김 사장이 대장장이 일을 계속하기엔 너무 고된 일이었고 대장장이는 아랫것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계속된 설득에 김 사장도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1969년, 26살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서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김 사장은 할 일을 찾다가 을지로의 대장간에 들어갔고, 이미 기본기가 되어 있는 덕분에 금세 망치잡이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라 김 사장은 눈코 뜰 새 없이 일을 했고,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
그렇게 6년 동안 망치질을 하고 비로소 진짜 대장장이라 말할 수 있는 집게잡이가 되자 김 사장은 자기의 대장간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1978년에 중동에 일류기능공 자격으로 가게 되었다.